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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작은 이야기

아기토끼

 

 

 

2009년 문학저널 12월호


아기토끼.


                                                                      이규정(李揆貞)




 오랜만에 쫓아가는 고향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서야 돌아오려고 나섰다. 승용차에 주저앉았더니 짙은 어둠과 함께 가랑비가 내렸다. 가랑비에 숨어드는 승용차의 불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시야거리가 짧았다. 쉽사리 내달리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승용차가 한참이 지나서야 박달재터널을 빠져나왔다.



박달재를 지나면서도 여전히 부슬거리는 가랑비에 승용차의 불빛이 숨어들었다. 희미한 승용차의 불빛에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아버리는 승용차가 곧바로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멈추었다. 다행히 승용차의 바퀴에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야 안도하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전에도 밤에는 승용차 불빛으로 달려드는 고양이가 있었다. 이번에도 고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얼마나 놀랐는지 서늘해지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내가 또한 휘둥그레 벌어지는 눈망울을 껌뻑거렸다. 그런데 승용차 아래서 슬그머니 나오는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하고 한참이나 내려다보고서야 아기토끼라는 것을 알았다.



전혀 뜻밖에 나타나는 아기토끼는 내주먹보다도 작아보였다. 승용차 앞에 오뚝이처럼 주저앉아서 앞발을 치켜드는 아기토끼가 눈망울을 훔치고 있었다. 승용차의 불빛에 눈이 부셨던 모양이다. 비켜달라고 경고음을 울렸더니 오히려 누구냐고 빤하게 쳐다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무런 겁도 없이 능청스럽게 쳐다보는 아기토끼가 귀여웠다. 아내가 또한 얼마나 귀여웠는지 붙잡아 가자고 꼬드겼다.



아내와 함께 아기토끼를 붙잡겠다고 슬그머니 내려섰다. 여전히 오뚝이처럼 주저앉은 아기토끼가 승용차 불빛을 마주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아내와 함께 덮치는 아기토끼는 우리보다 빨랐다. 아기토끼는 빠져나가고 아내의 머리에 부딪치는 이마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번쩍거렸다. 얼얼한 이마를 움켜쥐고 깡충거리고 도망가는 아기토끼를 쫓아갔다. 하지만 곧바로 풀숲으로 숨어드는 아기토끼를 붙잡는다는 것은 어림없는 짓이었다.



한참이나 풀숲을 헤매다가 돌아오는 승용차에 주저앉았다. 가랑비에 젖은 옷자락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괜스레 옷만 버렸다고 타박하면서도 아기토끼를 놓쳐버린 것이 아쉽고 억울했다. 아내가 또한 얼마나 아쉬웠는지 붙잡아서 키우려고 하였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아파트에서 어떻게 키우느냐고 타박하면서 시골에 막내 동생을 주겠다는 하였다.



아내는 돌아오면서도 집에서 키우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나또한 막내 동생을 주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차츰 커지면서 얼굴조차 붉히는 말다툼이 벌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괜스레 붙잡지도 못하는 아기토끼를 들먹거리며 말다툼을 하였다며 마주보고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놓쳐버린 아기토끼가 아쉽다는 한숨이 멈추지 않았다.



아기토끼가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유리알처럼 맑은 눈망울 때문이다. 갓난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눈빛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무런 욕심이 없으니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것 같았다. 승용차가 달려들어도 능청스럽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오뚝이처럼 주저앉아서 깡충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게 보였는지 아직도 그 모습에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내가 좋다고 행동했다가 남에게 적잖은 피해를 주기도 한다. 가끔은 무심코 내던지는 말에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또한 생활환경의 차이나 가정환경의 차이가 다르고 생각하는 사고가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하찮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하찮은 욕심으로 벌어지는 아귀다툼이 작지는 않다.



내가 아기토끼를 붙잡겠다고 달려드는 것 또한 하찮은 욕심이었다. 아무리 귀엽다고 붙잡는 것은 아름다운 꽃가지를 꺾는 일이나 별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아직도 엄마의 젖꼭지를 물어서야 자라는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아기토끼였다. 우리가 하찮다고 생각하는 짐승이지만 귀엽다고 붙잡는 것은 생존하는 생명을 부정하는 행위다.



사람이나 짐승들이 또한 살아가는 환경이 갑자기 바뀌면 적잖은 고생을 한다. 혹시라도 아기토끼가 붙잡혔다면 갑자기 바뀌는 생활환경에 적응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공들여서 키워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기토끼가 자칫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귀엽다고 붙잡아서 가둔다는 것이 죄악이라는 생각에서야 아기토끼가 도망을 간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