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정 <소설가>
나는 타관 객지인 울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아내와 결혼하면서도 슬레이트 지붕에 부엌에 딸린 달 셋방에서 살았다. 거기에다 직장조차 마땅찮았다. 가물에 콩 나듯이 쫓아가는 공사장의 수입에서 밥이나 굶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한여름의 긴 장마와 한겨울에는 그것마저 못하다보니 달세가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쌀과 연탄까지 외상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한 해 겨울을 지나면서 갑작스러운 사고에 적잖은 돈이 필요했고 그것도 분초를 다투는 시간에서 목숨조차 위험한 지경이었다.
산동네에 달동네나 다름없는 빈민촌에서 누구에게든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만한 돈이 있었다면 토끼장이나 다름없는 셋방의 빈민촌에서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만한 돈이 있더라도 보증금조차 없는 셋방살이의 나에게 무엇을 믿고 빌려주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빌려보겠다고 쫓아다녔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그때 요행히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은 버스정류장이나 공장 앞에서 헌책을 펼쳐놓는 책장수였다.
우리가 책장수라고 불렀던 그분 또한 우리와 똑같이 달 셋방에서 살았다. 길바닥에다 펼쳐놓는 헌책을 팔아서 밥이나 굶지 않을 정도로 살았는데, 그분은 밥줄이나 다름없는 장사 밑천에 그 돈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서야 고향에서 융통해 준 돈으로 갚았지만, 그분은 보름이나 장사까지 접어버리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봄이 되어서는 내가 취직을 하면서 이사를 하였고, 그분 또한 이사를 하였다. 전화조차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연락조차 못하다가 30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는 않았다. 언제든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분을 만나고 싶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였고, 지난해에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수필을 동인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뜻이 있다면 길이 있다더니, 아내가 우연찮게 그분을 만났다. 친구들과 놀러가는 옥천에서 만났는데 아내가 먼저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아내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곧바로 알려주는 전화로 통화를 하였더니, 그분은 예전에 그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살았던 모양이다. 내가 고맙다는 이야기에서도 믿기지 않는 눈치에서 우리가 찾아주는 것만도 어지간히 반기면서 좋아하셨다.
나보다 한참이나 연장이어서 이제야 서로 형님과 동생으로 지내자고 약속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적잖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은 그분만이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 이렇게나마 살았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누구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는 것이 많다보니 언제나 빚지고 살아가는 느낌이어서 부끄럽기도 하다.
나는 부족한 글이나마 창작소설을 출간하면서 수필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이 많았기에 그분들에게 고맙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많았다. 아직도 모든 것이 부족한 나로서는 앞으로도 수필로 표현되는 글들 또한 마찬가지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그것이 또한 언제나 빚지고 살아가는 느낌에서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겠다는 알량한 생각에 부끄러워 고개가 숙연해진다. |